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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념이기도 하지만, 지식은 실천으로 옮겨질 때 의미가 있다. 머릿속에 담아두고 뽐내기 위한 지식이라면 한 되의 거름과도 바꿀 가치가 없다. 때문에 배웠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오히려 배움이란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다. 자원의 낭비고 기회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배운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당신 앞으로 돌린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한 동생이 인텔리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가진 까닭은 배웠다는 명목 하에 죽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소통 방법 또한 폼 나게 ‘인텔리전트’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폐쇄적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친구는 ‘자신이 인텔리에게 갖는 선입견에 대한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 보통 배운 사람들이 사회 주도권을 대부분 가져간다. 이 친구는 이 게임에서 소외된 사람이다. 중졸 학력으로는 뭘 해볼 도리가 없다. 게임에서 소외 됐을 뿐 아니라 소통에서도 소외된 사람이다. 사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내가 그 친구에게 조심하는 까닭 또한, 혹시나 마음 속 어딘가의 자존심을 나도 모르게 상처주지나 않을 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결국 이건 내가 그 친구에게서 느끼는 콤플렉스다.
분명 현실의 일단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기에 외면할 수도 없다. 이런 문제는 오해를 사기 쉽다. 터부시 되는 경향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관계라는 것이 준거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여유가 있다면 사회학에서 말하는 준거이론에 대해 읽어보시길 부탁드리지만, 다음과 같은 설명 정도는 가능할 듯하다. 예컨대 선배들로부터 “대학 졸업하고 동문회를 가면 잘나가는 친구들만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해가 된다. 모이는 사람의 면면을 세속적 기준에서 따져보면 보면 소위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봐도 ‘범생이’ 집단이 있는가 하면, ‘날라리’ 집단이 있다. 다들 끼리끼리 모인다. 그 편이 서로 간에 우열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이 서로 소통하기 힘든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주제는 재미가 없다. 편한 사람끼리 만나면 될 것을 굳이 이런 저런 현실적이며 불편한 문제까지 고민하며 소통의 영역을 넓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면을 지워버리고 자신만의 리-그 속에서 살아가면 편하다. 굳이(처음에 말 한 대로) 이질적인 상대에게 시간을 투자해가며 익숙한 관계가 되고자 노력할 필요 없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워버린 세상의 한 쪽 또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불평등과 관련된 사회과학 서적 어느 한 페이지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 대해 실천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가 대체로 상식적일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상식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나의 결론 또한 상식적일 개연성이 높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내가 굳이 이런 동의를 얻고자 함은, 실천적 고민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킬 것을 담보하기 위해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제한된 관계 속에서 소통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진다. 예컨대 개인적 경험을 말하자면, 2002년 대선 뒤 당시 내 주변에는 노무현 지지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고학력에 20~30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또한 내가 주로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과는 소통이 쉽고 정치 화제를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다. 문제는 얼마안가 벌어졌는데, 내가 다른 이질적인 집단에 소속됐을 때이다. 여기는 20대 초반의 중등학력자가 많았는데 대체로 이회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노무현 지지발언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화제 자체를 이야기 할 기회가 적었다. 내가 이런 경험에서 얻은 시사점이란 다음과 같다. 인간 인식의 지평이 제한적일 수록 세상을 보는 관점 또한 왜곡될 소지가 높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 다수 여성들이 여권신장을 중요한 사회적 문제라 생각 할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여성 스스로의 정치, 경제적 권익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천착하며 실천운동 전면에 나서고 있는 사람은 소수다. 아마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은 여권의식이 강한 주변 사람과 소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질적인 대상과 소통이 어렵다고 해도, 이를 시도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계속 강조하지만 인간은 평등하기에 같은 사회적 권리를 누릴 필요가 있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현실이다. 셋째, 따라서 소통의 과정에 일종의 우열감이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감정적 요인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소통이 막히면 몰이해를 낳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은 불평등을 방관하게 된다. 넷째, 따라서 평등한 사회적 권리를 위한 인간 상호간의 이해와 소통이 필요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됐을 때 평등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대화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넋두리는 직접적인 무시다. 사회적 평등을 고려하는 사람은 이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 또한 소통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한다. 내가 노무현 지지자들만 만난다면, 나는 세상을 반쪽만 인식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주장을 골고루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 또한 균형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고해야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타당한 결론으로 받아들여 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폭넓은 소통이 필요하다.
내 친한 동생과 나는 꽤 많은 시간 술잔을 기울여왔다. 때문에 공통의 화제가 생겼다. 이는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한 결과다. 난 앞으로도 폭 넓게 소통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도 무엇보다 인간 대 인간의 진솔한 소통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값싼 우월감 따위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해받을 권리가 있고 동시에 상대를 이해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통에 인색해지면 안 된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달리트(인도의 불가촉천민, 하리잔)와 먹고 자며 생활한 간디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특권과 권위를 벗어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우월한 능력은 책임이지 특권이 아니다.
내 신념이기도 하지만, 지식은 실천으로 옮겨질 때 의미가 있다. 머릿속에 담아두고 뽐내기 위한 지식이라면 한 되의 거름과도 바꿀 가치가 없다. 때문에 배웠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오히려 배움이란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다. 자원의 낭비고 기회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배운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당신 앞으로 돌린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한 동생이 인텔리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가진 까닭은 배웠다는 명목 하에 죽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소통 방법 또한 폼 나게 ‘인텔리전트’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폐쇄적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친구는 ‘자신이 인텔리에게 갖는 선입견에 대한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 보통 배운 사람들이 사회 주도권을 대부분 가져간다. 이 친구는 이 게임에서 소외된 사람이다. 중졸 학력으로는 뭘 해볼 도리가 없다. 게임에서 소외 됐을 뿐 아니라 소통에서도 소외된 사람이다. 사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내가 그 친구에게 조심하는 까닭 또한, 혹시나 마음 속 어딘가의 자존심을 나도 모르게 상처주지나 않을 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결국 이건 내가 그 친구에게서 느끼는 콤플렉스다.
분명 현실의 일단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기에 외면할 수도 없다. 이런 문제는 오해를 사기 쉽다. 터부시 되는 경향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관계라는 것이 준거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여유가 있다면 사회학에서 말하는 준거이론에 대해 읽어보시길 부탁드리지만, 다음과 같은 설명 정도는 가능할 듯하다. 예컨대 선배들로부터 “대학 졸업하고 동문회를 가면 잘나가는 친구들만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해가 된다. 모이는 사람의 면면을 세속적 기준에서 따져보면 보면 소위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봐도 ‘범생이’ 집단이 있는가 하면, ‘날라리’ 집단이 있다. 다들 끼리끼리 모인다. 그 편이 서로 간에 우열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이 서로 소통하기 힘든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주제는 재미가 없다. 편한 사람끼리 만나면 될 것을 굳이 이런 저런 현실적이며 불편한 문제까지 고민하며 소통의 영역을 넓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면을 지워버리고 자신만의 리-그 속에서 살아가면 편하다. 굳이(처음에 말 한 대로) 이질적인 상대에게 시간을 투자해가며 익숙한 관계가 되고자 노력할 필요 없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워버린 세상의 한 쪽 또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불평등과 관련된 사회과학 서적 어느 한 페이지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 대해 실천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가 대체로 상식적일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상식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나의 결론 또한 상식적일 개연성이 높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내가 굳이 이런 동의를 얻고자 함은, 실천적 고민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킬 것을 담보하기 위해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제한된 관계 속에서 소통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진다. 예컨대 개인적 경험을 말하자면, 2002년 대선 뒤 당시 내 주변에는 노무현 지지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고학력에 20~30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또한 내가 주로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과는 소통이 쉽고 정치 화제를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다. 문제는 얼마안가 벌어졌는데, 내가 다른 이질적인 집단에 소속됐을 때이다. 여기는 20대 초반의 중등학력자가 많았는데 대체로 이회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노무현 지지발언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화제 자체를 이야기 할 기회가 적었다. 내가 이런 경험에서 얻은 시사점이란 다음과 같다. 인간 인식의 지평이 제한적일 수록 세상을 보는 관점 또한 왜곡될 소지가 높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 다수 여성들이 여권신장을 중요한 사회적 문제라 생각 할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여성 스스로의 정치, 경제적 권익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천착하며 실천운동 전면에 나서고 있는 사람은 소수다. 아마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은 여권의식이 강한 주변 사람과 소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질적인 대상과 소통이 어렵다고 해도, 이를 시도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계속 강조하지만 인간은 평등하기에 같은 사회적 권리를 누릴 필요가 있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현실이다. 셋째, 따라서 소통의 과정에 일종의 우열감이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감정적 요인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소통이 막히면 몰이해를 낳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은 불평등을 방관하게 된다. 넷째, 따라서 평등한 사회적 권리를 위한 인간 상호간의 이해와 소통이 필요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됐을 때 평등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대화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넋두리는 직접적인 무시다. 사회적 평등을 고려하는 사람은 이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 또한 소통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한다. 내가 노무현 지지자들만 만난다면, 나는 세상을 반쪽만 인식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주장을 골고루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 또한 균형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고해야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타당한 결론으로 받아들여 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폭넓은 소통이 필요하다.
내 친한 동생과 나는 꽤 많은 시간 술잔을 기울여왔다. 때문에 공통의 화제가 생겼다. 이는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한 결과다. 난 앞으로도 폭 넓게 소통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도 무엇보다 인간 대 인간의 진솔한 소통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값싼 우월감 따위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해받을 권리가 있고 동시에 상대를 이해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통에 인색해지면 안 된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달리트(인도의 불가촉천민, 하리잔)와 먹고 자며 생활한 간디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특권과 권위를 벗어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우월한 능력은 책임이지 특권이 아니다.

